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문단 편집) === 교회의 부패와 종교개혁의 관계에 대한 오해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마르틴 루터, version=775, paragraph=2. 및 2.1)] 교회의 부패와 종교개혁의 관계에 대한 다른 오해도 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부패가 그 정도를 더하며 심해지다가 극에 달했을 때 그 반작용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부패상은 그 이전 시대보다 오히려 나았다. 경건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종교개혁 시기의 교회가 더 타락했다는 생각은 상황을 거꾸로 이해한 것이다. >독신제의 준수는 이 성직자 프롤레타리아의 대부분에게 문제 밖의 일이었음이 확실하다. 독신제가 실제로 어느 정도나 준수되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나라마다 사정이 매우 달랐다. 15세기 독일(쾰른 또는 콘스탄츠)의 시찰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구 사제의 ⅓이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정도만 해도 비교적 양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문제에서 그리고 민중들의 종교생활에서는 더더욱, 중세 말과 종교개혁 직전의 상황이 이른바 건전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나빴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1500년 전후의 시기는 특히 독일에서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고 신앙이 뜨거웠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 종교적 이상과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교회구조들 사이의 괴리는 더욱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당시 개혁에의 외침은 전반적인 쇠락의 증거가 아니라 종교적 활력의 증거였다. >----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5, 213쪽, 강조는 인용자가 하였다. 샤츠의 결론은 단순히 독신제의 준수만을 근거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부패가 나아지는 다양한 증거를 열거한 끝에 나온 결론이다. 교회에서 부패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객관적 의미에서 옛날보다 더 타락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경박한 비유를 들자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진심을 담고 있더라도 '아름다운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사실 가톨릭에서도 개신교에서도, '요즘 그리스도 인들은 신앙이 없다'는 식의 아우성은 21세기 현재도 넘쳐난다. 아무리 그것이 진심을 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객관적인 비교인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물론 현대인의 기준에서는 이 시대의 생활상에 여러모로 불만이 많겠지만. 그러니 교회의 부패상이 종교개혁의 여러 계기 중 하나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부패가 극에 달해 그 반작용으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당대 가톨릭의 부패상에 대한 반론으로 Eamon Duffy는 저서 [[https://scholar.google.com/scholar?hl=ko&as_sdt=0%2C5&q=Eamon+Duffy+Decadent&btnG=#d=gs_qabs&u=%23p%3DPCMlWBuSwgQJ|The stripping of the altars: traditional religion in England, 1400~1580]]([[예일 대학교]] 출판부)에서 중세 후기 가톨릭이 '타락하지도 부패하지도 않았음(neither decadent nor decayed)'을 보였으며[* Traditional religion had about it no particular marks of exhaustion or decay, and indeed in a whole host of ways, from the multiplication of vernacular religious books to adaptations within the national and regional cult of the saints, was showing itself well able to meet new needs and new conditions(전통적 믿음은 쇠퇴했다거나 부패했다는 흔적은 없으며, 정녕 모든 경로에서, 토착어 신심 서적들의 증가에서부터 국가적, 지역적 성인 공경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믿음은 새로운 수요들과 상태들을 충족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Peter Marshall은 16세기 초 독일의 종교적 상황을 "모든 증거는 16세기 초에 독일이 경건한 정통 가톨릭 사회였음을 가리킨다"[* 《종교개혁》(이재만 옮김)]고 서술했다. 요점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타락을 정화하기 위해 일어났다!'라고 하는 단순한 이해를 배격하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Marshall의 [[https://www.fromthedesk.org/10-questions-peter-marshall|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거대하고 다층적인 과정들을 단순화(simple explanations for large and multi-layered processes)하는 것을 불신하고, 학생이 과거에 생각하던 것보다 복잡하다고 말하면(when students report back to me that some aspect of the past turns out to be more complicated than they had previously thought) 기쁨을 느끼는(…) 역사학자이다. --교수님 취향이?--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지극히 복잡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적절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유사하게 개신교계에서도 중세 가톨릭 교회가 도덕적으로 더 타락하였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를 종교개혁의 주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 애초에 개개인이나 집단의 도덕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학계의 고려사항이 아니다.[* 다만 과거 역사가들의 해석{{{-2 (예:[[http://m.egloos.zum.com/charger07/v/4131877|휘그 사관]])}}}에 의해서 악당 낙인이 잘못 찍혔을 때{{{-2 (예: [[http://m.egloos.zum.com/charger07/v/4103582|블러디 메리]])}}} 이를 바로잡는 경우는 있다.] 루터의 개혁이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학문적 기반의 교리와 개혁이라면 공의회 주의 수도원 운동 등 가톨릭 내부의 개혁 운동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학자들이 가톨릭의 개혁운동을 루터의 1517년 사건과 명백하게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 원인을 다룰 때에는 [[인문주의]], [[스콜라 철학]], 당시의 문화·정치·사회상 등을 복합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개신교 측에서 정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려면 [[http://www.kocw.net/home/cview.do?mty=p&kemId=669761|이곳]]을 참조하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